12세 소년, 북청 남문루에서 세상의 부당함을 호소하다
1859년 1월 21일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태어난 이준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조부 이명섭과 작은 아버지 이병하 밑에서 자랐다.
이준의 원래 이름은 성재(性在)였다. ‘인간이란 본시 하늘의 뜻을 따름이다’라는 뜻이다. 이준은 성장해서 ‘세상에 널리 빛난다’는 뜻을 담아 이름을 준(儁)으로 고치고, 호를 일성(一醒)으로 짓는다. 일성(一醒)은 ‘세상을 한번에 깨우침’을 의미한다. 실제 세상을 보는 선각자적 식견과 정세 판단력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되고 있는 이준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난 두각을 나타냈다.
열두 살에 사서삼경에 이른 이준은 같은 해 북청 향시에 응해 합격한다. 하지만 나이가 너무 어린 이준은 시험에 붙고도 급제하지 못한다. 부당한 처우를 받았다는 생각에 화가 난 어린 이준은 시험지를 들고 북청 남문루에 올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억울함을 호소한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협기있고 배짱이 좋았던 이준은 이 일을 계기로 장차 장인이 될 주만복이라는 사람의 눈의 띄게 되니, 세상의 부당함에 대한 열두 살 어린 소년의 용감무쌍한 도전은 당시로서도 대단히 인상적인 사건이었음에 틀림없다.
인간 이준의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는 또 있다.
열일곱 살에 무작정 서울로 온 이준은 우연히 대원군을 만나게 된다. 당차고 기개 넘치는 젊은 청년으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은 대원군은 그를 형조판서 김병시 대감에 천거한다. 대원군으로부터 이준의 됨됨이를 익히 들어 알고 있던 김병시는 이준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하면서 어디를 가든 이준을 데리고 다니면서 세상을 배우게 한다. 그러던 하루 이준은 고향친구가 자신을 만나러 오자 김병시 대감의 아들 김용규의 담뱃대로 담배대접을 한다. 이를 목격한 김용규가 감히 상민에게 자신의 담뱃대를 물렸다하여 원망하자 이준은 '그까짓 양반 자존심은 버려라. 사람 있고 물건 있지, 양반 물건이라고 사람 위에 있단 말이냐!'고 반발하며 화가 치민 나머지 담뱃대를 분지르고 김병시 대감의 집을 떠나 고향 북청으로 돌아와 버린다. 분개한 김용규는 함흥 감사 이돈하에게 이준을 체포해 벌하라고 요구하기에 이르고, 이돈하는 김용규의 요구대로 북청에 사람을 보내 이준을 잡아오라고 명한다. 이 소식을 들은 이준은 제발로 먼저 이돈하를 찾아가 이렇게 따진다.
“고작 담뱃대 하나로 사람을 잡아 벌한다면, 이는 공법이 아니라 사법이 아닙니까?”
이준의 항변이 옳다고 느낀 이돈하는 뒤늦게 깨달은 바가 있어 그를 처벌하지 않고 돌려보낸다.
이러한 이준의 성정은 차후 탐관오리를 처벌하고 고위관직자들의 비리를 척결하는 검사로서의 본분을 지키는 데서도 거리낌 없이 발현된다. 또한 외교권을 박탈당한 무명국가의 대표자 자격으로, 불굴의 의지력과 담대함이 요구되는 헤이그 특사의 적임자로 발탁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민족열사로서의 구국활동
이준은 1898년부터 ‘조선독립협회‘가 주최하는 ’만민공동회‘(관리와 백성의 공동 토론회)에 적극 가담한다. 만민공동회는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열린 일종의 민중대회로, 외세 배격과 언론.집회의 자유를 주창하는 민주주의적 성격의 운동으로 이준은 총무장으로 참여, 대회를 주관한다. 그러다 수구파의 모략에 의해, 이승만, 이동녕 등과 체포되어 투옥되기도 한다. 이준은 만민공동회 활동을 함께 한 민영환, 이상재, 이상설, 이동휘 등과 개혁당을 조직하기도 한다.
1904년 한일의정서를 근거로 일본이 한국의 황무지개척권을 일본인에게 특허해줄 것 요구하고나서자, 전국 도처에서 보안회를 중심으로 저항운동이 일어난다. 이준은 보안회 가입, 반대 상소와 시위운동을 주도한다. 일본의 개입으로 보안회가 와해된 후, 이준은 이상설, 이상재, 이동휘 등과 함께 보안회의 후속 단체로서 대한협동회를 조직, 민족운동을 이어나간다. 이준은 이러한 와중에 일본 헌병에 강제 체포 되기도 하나, 고종의 특사로 풀려난다.
이준은 또한 개화노선을 표방하고 민회를 열어 정부를 비판하고 내정개혁을 요구하였던 공진회에 참여해 적극적인 활동을 펼친다. 그러던 1904년 12월, 이준을 비롯한 공진회 간부들이 비행이 심한 궁내부 관리들을 탄핵하다가 대신을 모욕하였다는 이유(大典會通 推斷條 醜辱大臣者律)로 체포된다. 유형 3년을 선고받은 이준은 황해도 해주의 철도(鐵島)에 유배되나, 이번 역시 고종의 특사로 풀려난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 이준은 계몽활동에 주력하였다. 1905년 5월에는 윤효정, 양한묵 등과 함께 헌정연구회를 창립, 부회장직을 맡는다. 헌정연구회는 왕실이나 정부라도 헌법과 법률을 따라야 되며, 국민은 법률이 보장하는 권리를 자유롭게 누릴 수 있어야 함을 주창한 근대 법학에 기초한 법치주의의 확립을 지지한 단체였다. 또한 황성신문에 따르면 이준은 1905년 9월 국민교육회라는 친목회에 참석, 연설을 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듬해인 1906년 4월 이준은 국민교육회 회장으로 취임해 국민교육운동에 앞장선다. 1907년 고종의 위임장을 가지고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는 네덜란드 헤이그로 떠날 무렵, 이준은 ‘한국혼 부활론’을 집필하고 대한자강회의 초청을 받아 청년들에게 ‘생존의 경쟁’이란 강연을 하기도 한다.
이준을 비롯한 헤이그 특사가 머물렀던 드 용 호텔(De Jong Hotel)은 현재 이준평화박물관(Yi Jun Peace Museum)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 때 그 시절 타지에서 대한제국 열사들이 견뎌야했던 설움과 고초는 응분의 세월 속에 녹아들어, 오늘날 박물관을 방문하는 후세들의 가슴 속에 애국혼의 불씨로 되살아나고 있다.
※ 참고문헌 : <이준열사, 그 멀고 외로운 여정> , (사)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