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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가 자격으로 헤이그에 특파되다
헤이그에 뿌려진 통한의 눈물

1905년 일제는 고종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하여 강압적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이에 고종황제는 을사조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되었음을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3인의 특사를 파견한다. 이준은 특별히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법률가로서, 국제법에 입각한 일본의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위 시는 이준이 고종황제로부터 헤이그 특사 밀령을 받고 어전에서 물러나오며 지은 시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서라도 사명을 다하겠다는 이준의 결연한 의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위의 시에서 볼 수 있듯, 우국지사 이준의 생사관은 뚜렷했다. ‘뜻을 세워 잘 살지 못하면 살아있어도 죽은 것과 다름없다’는 이준의 확고한 신념은, 나중에 그가 헤이그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정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고종황제의 밀령을 받은 이준은 위태로운 나라의 운명이 자신의 손에 달렸음을 통감하며, 위임장을 가슴에 품고 1907년 4월 헤이그로의 대장정에 오른다. 부산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베를린을 거쳐 헤이그까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러시아를 가로지르는 64일간의 고난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서울에서 홀로 출발한 이준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을 만나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러시아 공사관의 참서관으로 있던 이위종을 만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간다. 이들은 베를린을 거쳐 6월 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해, 숙소인 드 용 호텔(Hotel De Jong, 현 이준 열사 기념관)에 태극기를 건다.

64일의 장도 끝에 어렵게 헤이그에 도착한 특사 일행은 안타깝게도 일본의 방해를 받아 입장을 거부당한다. 을사조약에 의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었다는 이유이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특사 일행은 6월 28일 대한제국이 독립국임과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를 평화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에게 배포한다. 이 글은 6월 30일자 ‘만국평화회보(Courrier de la Conférence de la Paix)’를 통해 보도되면서 각국 신문기자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특사 일행은 회의장 입장을 위해 러시아 대표이자 만국평화회의 의장인 넬리도프 백작에게 면담을 신청하지만 이를 거절당하자, 네덜란드 대표이자 평화회의의 부의장인 드 보포트(W. H. de Beaufort)와 접촉하여 회의장 입장을 요구하고, 영국, 미국, 프랑스 등에 도움을 호소하지만 이 역시 일본의 방해와 각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실패로 끝나고 만다.


헤이그 만국평화회보는 7월 5일자 ‘축제 때의 해골’이라는 기사를 통해 나라를 잃고 고군분투 하는 대한제국 특사들의 사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닫혀있는 회의장 문 앞에 앉아있던 이위종과 기자 의 일문일답 형식으로 작성된 이 기사는 을사조약의 불법성과 법과 정의가 무시당하는 부당한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축제 때의 해골" 기사가 실린 7월 5일자<만국평화회보>
헤이그 특사 3인의 사진이 게재되어 있다.

7월 8일 세 특사는 ‘서클 인터내셔널(국제기자협회, The Foundation of Internationalism)'의 특별 손님으로 초청되어 일본의 한국 침략을 규탄할 기회를 얻는다. 헤이그 특사들의 열정적인 호소는 많은 참석자들에게 감명을 준다. 미국의 ‘인디펜던트(Independent)'지는 7월 9일자에 이위종의 연설문 전문을 실었고, 당대의 유명 삽화가 루이스 라이마컬스(Louis Raemaekers)는 평화의 상징인 예수가 초청을 받지 못하여 회의장 입장을 거절당하는 모습을 그려 만국평화회의를 비난한다.


헤이그 특사들의 예상치 못했던 활약상에 격노한 일본은 한국에 있던 고종황제를 협박해 헤이그 특사 위임장이 날조된 것임을 확인하는 서한을 쓰게 한다.

결국 헤이그 특사 3인은 이 서한을 근거로 회의장 퇴장을 공식 요구 받기에 이른다.
이들이 가슴에 품고 달려온 조국독립의 꿈이 이역만리 떨어진 헤이그에서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이준은 사망한다.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결코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는 이준의 결의가 그대로 현실이 되어 버린 것이 다.
망국의 한을 품고 숨을 거둔 이준의 장례식은 유족도 없는 헤이그에서 쓸쓸하게 치러진다.


이준의 유해는 광복 후 한국으로 봉환되어 돌아온다.
장례식은 1963년 10월 4일 국민장으로 거행되었고, 애국혼을 불사르며 서울을 떠났던 이준은 이역만리에서 56년을 기다린 후에야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와 해방조국의 품 안에 고단한 영혼을 내려놓았다.

※ 참고문헌 : <이준열사, 그 멀고 외로운 여정> , (사)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